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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17 Europe+Russia

흐리면 흐린대로 블레드 02.10.- 02. 11.

류블랴나 기차역에서 블레드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지도로 볼 때는 블레드 주변에 역이 여러 개 있어서 뭘 사야 되는지 고민했지만 그냥 Lesce bled로 했다.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블레드에 간 김에 빈가르라는 곳으로 갈 수 있을지 고민을 했는데 시간상 포기하기로 했다.

 

블레드 역에 내려 구글 지도로 나오는 대로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내가 가는 곳으로 기사가 안 간다고 해서 타지 않았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 버스가 맞았기 때문에 좋은 기분으로 시작하지 못했다. 몇 대의 다른 버스를 보내고 결국 탄 버스에서는 또 내릴 때 내리지 못해서 한참을 걸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핸드폰 배터리가 거의 남지 않았다. 그래서 잘 알지 못하는 곳이지만 구글 지도에서 길 이름과 가는 방향을 머리에 새겨넣고 캐리어를 열심히 끌면서 찾아갔다.

 

 

 

숙소는 비앤비 형식이었는데, 주인은 없고 열쇠만 꽂혀 있었다. 다행히 방이 아늑하고 편안해 보여서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누워있고 싶었지만 블레드에 머물 시간이 하루 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시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가는 길에 성당이 보여 들어갔다. st. Martin이라고 하는데 찾아보니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스산한 날씨만큼이나 음산한 기운이 돌았다. 괜히 무서운 느낌이 들어 오래 있진 않았다.

 

 

 

 

 

 

 

블레드 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산길이었다. 그래도 올라가는 길이 그리 멀거나 험하지 않아 금방 올라갔다.

 

 

한국어 가이드가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지만 딱히 볼 내용은 없었다.

 

 

블레드 호의 맑은 물과 그 위에 은은하게 떠 있는 성모승천교회를 바라보면서 휴식을 취한다는 계획은 짙은 안개와 뿌연 눈 속에서 사라졌다.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는 그나마의 운치가 있지만 이것도 그나마 확대를 한 것이고, 눈으로 볼 땐 잘 보이지도 않았다.

 

도시 쪽으로 눈을 돌려도 특별한 건 없었다.

 

 

 

최대한 확대를 해서 교회 모습이라도 좀 자세히 볼까 했는데 쉽지 않았다.

 

 

 성 안에 있는 기념품 샵에서 마그넷이나 몇 개 샀다.

 

 

 

 

 

 

 

 

 

 

 

갑자기 주변이 시끄러워져서 중국인 관광객들이라도 왔나 했는데 한국인 관광객들이었다. 차라리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없어 혼자 타이머로 고생하던 때가 낫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와중에 한 가족은 싸우고 난리가 났다. 사춘기 여자애처럼 보이는 딸이 조금 틱틱거리자 분노조절이 있어보이는 엄마가 동네방네 소리를 지르고 아직 한참 어린 아들이 엄마를 달래고 사진이라도 찍자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는 아빠는 면박만 받는 엉망진창의 장면이었다. 주변에 있던 외국인 관광객들, 특히 중국인 관광객들을 보기가 참 많이 민망했다.

 

 

 

 

 

 

기분도 전환할 겸 인쇄공방에 들어갔다. 이곳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의 복제품으로 인쇄를 해주는 곳으로 기념품을 사기에 좋다. 잘생긴 청년이 맞이하길래 신나서 이것저것 샀다. 활자 조합은 해주지만 막대기를 왼쪽 끝으로 돌려 글자를 찍을 때는 원하는 사람은 직접 해볼 수 있게 한다. 꽤나 뻑뻑하다.

 

 

 

 

 

 

 

 

해질 녘이 되자 점점 주변 하늘이 짙푸른 색을 띄기 시작했다. 곧 어두워지겠다 싶어 내려가기로 했다. 성과 주변 마을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몸도 힘든데 원하는 그림을 보지 못해 아쉬운 데다 안 좋은 모습들만 보아 아쉽던 차에 호수 건너 편에서 바라본 블레드 성의 야경은 아주 아름다웠다. 사진에서 성이 비치는 곳은 얼음이었다. 얼음이 아주 깨끗이 얼어서 저렇게 선명히 비칠 수 있었다.

 

 

호텔인지 뭔지 기억나지 않는데 작은 아이스링크가 있었다. 저 또한 낭만이 있겠다 싶어 다음을 기약하였다.

 

 

 

 

일단 저녁 시간이 되어서 밥을 먹기로 했다. 블레드의 기억을 아름답게 남기기 위해서 일부러 맛있는 걸 먹기로 결정했다. 사실 미각이 둔한 나는 한국에서도 맛있는 걸 먹어서 기분을 푸는 일은 잘 없다. 혼자 먹을 땐 언제나 배를 채우고 만다. 사람들을 만날 때에나 괜찮은 음식을 먹는데 이례적인 일이었다. 간단한 코스에 와인까지 얼떨결에 시켰다.

 

 

 

 

가장 기분이 좋았던 것은 사실 이 간단한 스프를 먹을 때였다. 천천히 먹을 때 바다가 입 안에 맴도는 듯한 느낌에, 왜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지 얼핏 알 것 같기도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뭐라도 할까 하다 그냥 돌아가서 쉬기로 했다. 카메라에는 밝게 담겼지만 사실 길은 매우 어두웠다. 낮에 본 동네의 모습이 시골 노인들이 사는 부촌 같아서 안심하고 가긴 했지만 경계태세를 늦추진 않았다. 숙소에서는 쓰러져 잤다.

 

 

 

 

그 날의 인스타그램에는 이런 글이 올라와 있다.

 

 

물이 얼어서 빈가르, 성모승천교회 모두 포기했는데 안개가 짙어 멀리서 보는 섬마저 흐리게 보인다. 불평이나 하려고 보니 낮부터 밤까지 불만을 터뜨릴 여지를 주지 않고 마냥 아름다운 블레드 호수.